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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 지암곡-부석-도깨비바위-금오봉-상사바위-국사곡 ) - 2024.04.20

T-가라지 2024. 4. 23. 13:58

경주 남산 ( 지암곡-부석-도깨비바위-금오봉-상사바위-국사곡 )  : 통일전주차장~서출지~무량사~우물터~동남산탐방센타~팔각정터갈림~지암곡갈림~지암곡2/3석탑갈림~지암곡제2사지 삼층석탑~절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기도터~마애불좌상~지암곡/국사곡 갈림~대지암상부~흔들바위(명품송암봉)~바위틈길~탁자바위~분재송~절터(보우사)~부석~뜀바위~팔각정자터~사자봉~포석정갈림~헬기장~공원지킴터~비파능갈림~도깨비바위~삼형제바위~금오봉~삼릉갈림~상사바위~포석정갈림~금오정~포석정/통일전갈림~고깔바위~국사곡석탑갈림~국사곡 제4지 삼층석탑~통일전주차장

 

 

경주 남산 ( 지암곡-부석-도깨비바위-금오봉-상사바위-국사곡 ) gpx track  :

2024-04-20 경주 남산 (지암곡2.3사지삼층석탑-부석-도깨비바위-금오봉-상사바위-국사곡4사지삼층석탑).gpx
0.19MB

 

 

※ 산행거리  :  약 9.5km..   산행시간  :  약 8시간 20분..

 

온산가득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 그윽할뿐만이 아니라 발끝에 채이는 돌뿌리 마저도 옛 선인의 숨결이 남은듯도 싶어 괜시리 조심스러워지는 천년고도 경주의 남산을 기웃거리던 길에 헐렁한 걸음을 자꾸만 잡아채던 것은  얕은 봄비 흥얼거림이 아니라 길모퉁이 바위틈새마다 배시시 고개를 내민 연분홍빛 연달래의 수줍은 유혹 ..

꽃술에 맺힌 가녀린 떨림에 ..서성일수밖에 없었던 무딘 걸음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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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841

 

경주 남산(慶州 南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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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통일전주차장에 애마 고이 모셔두고..

 

서출지..   

 

소문난 배롱나무야 7~8월쯤 꽃술 맺힐테고..

 

이건 [박태기나무] 꽃술??..

 

경주 서출지..

종 목 사적 제138호

지 정 일 1964.07.11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1길 17 (남산동 973)

시 대 삼국시대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무량사....

 

동남산탐방지원센타..

 

팔각정터 갈림 이정표..

 

반듯한 산길 옆에 만들어둔 [무장애산책로]의 정확한 용도가 사뭇 궁금해지고..

 

무장애데크길 끝자락..국사골/지암골 이야기를 소상히 그려둔 안내판 건너편에..

 

지암골 갈림 이정표..

 

 

흩날리는 봄비처럼 흐느적흐느적..산길을 잇다..

 

제법 큼지막한 바위덤이 둘로 나눠져 있길래..

 

혹...당기면 붙을래나..엉뚱힘 쓰는 시늉하는 이 지점이 2/3사지 갈림길 근처..

 

먼저 지암골 제2사지 방향으로..

 

경주 남산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00호

지 정 일 2012.10.22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6-1

시 대 통일신라시대

동남산 지바위골 절터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무너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과 그 이듬해에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하고 없어진 부재를 보충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기단은 단층으로 면석 받침과 면석은 각각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 각 면에는 2개의 모서리 기둥(우주)과 1개의 버팀기둥(탱주)이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는 몸돌 받침이 있고, 1~3층 지붕돌 밑면 받침은 모두 4단이다. 높이는 3.77m으로, 9세기 후반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첫번째 만난 문화유적에 급 다소곳해진 마음..

 

도돌이 걸음보다 계곡 우측 옛길따라 종종..

 

지암곡 제1사지터쯤으로 보이는..

 

절터에 맺힌 세월의 흔적 가로질러..

 

지암곡제3사지 오름길..

 

경주 남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9호

지 정 일 2012.10.22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5

시 대 통일신라시대

이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의 동록사자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310m의 완만한 능선 사면에 있다. 이 석탑은 무너져서 1층의 탑신 받침을 제외한 나머지 탑재가 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0년에 발굴조사하고, 2003년 1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네모난 바위 윗면을 조금 다듬어 기단으로 삼았고, 그 위에 별개의 돌로 만든 몸돌 받침이 올려져 있다. 1~3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각 지붕돌 밑면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은 경주 남산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며, 9세기 후반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는 3.88m로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석탑 중에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신식 테두리 옷을 입긴 했지만 탑 받침이 자연석이라 훨씬 더 예스러운 느낌과..

 

훨씬 더 애정이 가는 탓에...이젠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마음자락..

 

잔잔히 길을 이어가는 동안 얼핏 내비치는 연달래 치맛자락...

 

어라?...마음이 다시 콩콩..

 

지암곡의 가장 큰 지암 아래에서 만나는 육손 근세불...지장보살을 조각했음인가?..흔히 보이는 부처상과는 많이도 다른 모습에 고개 갸우뚱..

( ※ 100년 이내 근세에 만들어졌을거라 추정되는 부처상..근세불 또는 민불..)

 

 

기도에 쓰는 맑은 석간수터 모양새가 이채로와 기웃기웃..

 

기묘하게 얽힌 지암 표면..다시금 들여다 보고..

 

조금 더 돌았드니 또다른 근세불 하나..마애불좌상의 형태를 갖추긴 했으나 민간에서 조각한 것인지 수수함만이 그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도 들고..

 

국사곡과 지암골 갈림능선을 지나면..

 

길 옆에는 살랑살랑 연달래의 수줍은 춤사위 한가득..

 

이러니...걸음이야 자꾸만 늘어질수 밖에..

 

아주 조금 에돌아 큰지바위 꼭대기..

 

이곳에도 옛 선인들 정한수 놓고 치성을 올린 흔적 역력하고..( 남산 알바위에 있는 바위홈 두서너개..)

 

조곤조곤 내려서서..

 

우리네 발자국은 막아둔 옛길을 쫓아 오르는 걸로..

 

야틋한 바위덤 요리조리 꾸물대다..

 

비탈진 바위덤 머물며 살짝 눈빛 가누면..

 

옆지기는 코앞 명품송 바위덤에 올라 요리조리 꼬물꼬물..

 

후다닥 쫓아올라..

 

명품송 녹녹한 향내에 들숨 가지런히 접어내고..

 

바로 앞 [흔들바위]에서 삐딱빼딱 어울릴때만 해도..

 

이넘이 왜 흔들바위인지 눈치채지 못하다가..

 

오호...흔들바위...맞구만..옆지기 그림자를 쫓아 앞뒤로 스르륵...까딱까딱...

 

보는 방향에 따라 암컷과 수컷의 농농한 어울림으로 비치는..

 

웅장하고 듬직한 바위덤 틈새를 지나다..

 

호기로운 옆지기 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왼쪽 바위덤 꼭지에 폴작..

 

잔잔한 웃음하나 보란듯 건네오고..

 

흠....득도 고승의 쉼터로 제격일듯 싶은 이 바위덤은 달리 얻은 이름이 없는 모양일쎄..

 

아못거나 우리야 또 머물며 잔잔한 숨소리 다독이면 그뿐..

 

아무리..늘어진 걸음이라도 그렇지..

 

길한켠 낭낭한 바위덤에 올랐드니..

 

좀전 좌선대처럼 비치는 바위덤의 풍채가 하도 고고하게 비치길래..

 

쪼로록 되돌아 간 옆지기..

 

바위덤 아래 와 위..

 

앞으로...뒤로...담담한 바위내음 품어내느라 여념이 없고..

 

하기사...시간따위..동동거려봐야 무슨 소용..울먹이는 꽃술이 걸음 놓아줄 생각 당췌 없는데...

 

듬직한 전망바위덤에서 어슬픈 날개짓 챙겨낸 다음부터..

 

오름짓 내내..

 

오른쪽 산 언저리엔 오늘 걸음의 큰점중 하나...남산부석이 온화한 살내음을 전해 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퐁당놀음은 그칠기색 1도 없음이니..ㅎ

 

경주 남산 국사골 탁자바위..

   탁자바위(卓子巖)는 남산부석 아래에 위치하며 탁자처럼 위가 평평하여 남북으로 긴 모습이며 크기는 가로 5m, 세로 2.5m, 높이 1m 정도 이며 사람 20여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 바위 아래에는 작은 바위 3개가 탁자의 다리구실을 하듯 받치고 있다.

 

생김새 그대로...널찍펑펑한 탁자바위에 올라 눈높이 부석과의 반가운 입맞춤 먼저..

 

도도한 자태로만 치자면 여느 인위적인 분재송에 뒤쳐지지 않는

 

바위에 뿌리를 내린 자연 분재송에 살가운 인사도 살포시.. 

 

길넘어 부석이 손에 잡힐득한 지점이니 조금만 걸음 조아리면 금새 이르게 되겠지만..

 

샛길아래 역시 부처님 온화한 가피 엿보이는듯 하여 선뜻 내림 두었드니..

 

낙서처럼 대충 새겨둔 사찰 이름 (보우사..??) 바위옆에도..

 

수수한 미소..마애민불..하나..

 

살짝 풀어졌던 마음 톡톡 두드려 다시금 동여매고...

 

[남산부석]까지는 그냥 한달음..

 

남산부석 [ 南山浮石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南山)에 있는 바위.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南山)의 금오봉(金鰲峰)에 있는 바위이다. 속칭 뜬바위라고 한다. 바위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부석(浮石)이라고 불리며, 버선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다 하여 버선바위라고도 한다. 속설에 따르면 바위 밑으로 명주실을 넣으면 그대로 통과하여 반대쪽으로 나온다고 한다. 예로부터 경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상징하는 경주팔괴(慶州八怪)의 하나로 전해온다. [네이버지식백과]

 

자...이제부터는 남산부석...본격적으로 안아보기..

 

쑤그리고..

 

 

꽁그리고..

 

부석아래 널찍한 바위위에서..

 

퐁당퐁당...팔닥팔닥..

 

형언할수 있는 모든 놀음짓을 동원한것도 모자라..

 

물만난 옆지기...

 

곁가지 [뜀바위] 기둥 끝에도..

 

포올짝~.....요렇게...또 조렇게...

 

자기가 그러할진데...난들...못본척 지나칠순 없고..

 

다가선 김에 뜀바위 요기조기 곁눈질 했더니..

 

뜀바위에는 음과양의 오묘한 조화....여기저기..

 

되돌아 가기전..

 

부석과 어울어진 기막힌 품새들 일일이 담아두고..

 

다시 뽈뽈..부석 아래 틈새를 기어 넘어서..

 

행여..아쉬움따위 남을새라...요리조리 

 

상큼발랄한 놀음짓을 더 두고도....어라? 뭔가 또 허전한 느낌은 무엇??

 

자기는 요기 딱 서서 지둘리시옹~..

 

내 후딱 되돌아 내려가서..

 

숨죽인 하늘과...나른한 바람과..흩날리는 숲내음과 하나된..그래서 그대로 바위의 일부가 되어버린 잔잔한 그대모습 한번 담아 보리다..

 

요기서 이렇게...ㅎ

 

뜬바위더듬기 갈증은 어느정도 갈음되었다 치지만..

 

역시나 걸음을 잡아채는건 길모퉁이.. 바위틈새마다 여지없이 플러팅을 해오는 연달래 입술.. 

 

아무렇지 않은듯...그러나 의연한 자태로 자리한 바위덤 꼼꼼히 챙여내고..

 

연달래 분홍 춤사위 속에도 퐁당~한바탕 뒤척임을 더하고..

 

종종걸음 또박 챙겨 이른곳..

 

여기가 옛날 팔각정자가 자리했던 곳이구만..

 

이쪽 능선길에 대한 콩닥거림이야 이미 배부른 상태이니 만큼..

 

나긋한 꽃길 더 두런거리고..

 

길목의 [사자봉]은 그냥 스치듯...패쓰..

 

이제부터는 잘 정돈된 임도길을 따라..

 

헬기장도 지나고..

 

공원지킴터 의자에 풀썩..신발끈 다시 고쳐매기...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농염해지는 연달래 꽃술을 힐끔거리다..

 

걸음은 밑그림의 두번째 큰점이 있는 도깨비능선방향으로..

 

얼마 걸음 헤아리지 않아..눈앞에 떠어~억...

 

도깨비바위..

 

그 황홀한 품새에 부석에서의 폴닥거림은 까마득히 잊은채..

 

요리조리 더듬는 내내 입가에는 몰롱한 탄성만 한가득..

 

흠~..챙겨온 자일도 없고..곧추선 직벽..미끄럽기도하고..콩알만한 심장으론  차마 올라서볼 엄두가 나지 않는군...ㅠ

 

대신 아래로 바짝 붙어 에돌며..도깨비바위 숨겨진 모습 꼼꼼히도 안아보기..

 

호오~...어찌어찌하면 앞쪽 살짝 나온 바위턱까지는 오를수 있겠다고 낑낑 용을쓰는 옆지기..

 

무서운 양반...이젠 바위더듬기조차 한수 배워야 할판이군...ㅎ

 

어렵게 올라선 김에 요리조리 가능한 범위내의

 

꼼지락 살내음을 도깨비 할아비 품속에 전해주고..

 

자...인제 고만고만 조심해서 내려 섭시다..

 

다음다음 걸음 기회가 생기면 꼭 다시 들러 인사 올리겠다는 약속 어슬프게 남겨두고..

 

도깨비능선 내림길을 따라 조금더 기웃기웃..

 

그리고 냉큼 올라서고 본 이 바위덤...삼형제바위의 둘째바위쯤 될래나..

 

이넘은 순서상 막내바위..

 

가까이...위까지 접근 가능한 둘째바위 곁에서 아주 잠시 더 머물다..

 

되돌아 선 걸음 첫째바위 위용도 애써 담아 가야지...

그나저나 이 바위덤들이 왜 삼형제바위 ??...숲이 우거지지 않은 상태의 옛자료 챙겨봤더니 금새 긍정의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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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도깨비능선 삼형제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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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되돌아 올라선 능선...

 

자...이젠 또 어디로 걸음을 두어야 하나...

 

그래도 산에 올랐는데 대표 봉우리 하나는 견주고 가야겠지..

 

금오산...또는 금오봉..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는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 남산에는 40여 개의 골짜기가 있으며, 신라 태동의 성지 서남산, 미륵골·탑골·부처골 등의 수많은 돌 속에 묻힌 부처가 있는 동남산으로 구분된다. 남산 서쪽 기슭에 있는 나정은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깃든 곳이며 양산재는 신라 건국 이전 서라벌에 있었던 6촌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포석정은 신라 천년의 막을 내린 비극이 서린 곳이다. 동남산에는 한국적 아름다움과 자비가 가득한 보리사 석불좌상, 9m 높이의 사면 바위에 탑과 불상 등을 새긴 불무사 부처바위, 바위에 아치형 감실을 파고 앉은 부처골 감실 석불좌상이 있다. 남산에는 미륵골(보리사) 석불좌상, 용장사터 삼층석탑, 국보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비롯한 11개의 보물, 포석정터, 나정과 삼릉을 비롯한 12개의 사적,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입골석불, 약수골 마애입상을 비롯한 9개의 지방 유형문화재, 1개의 중요 민속자료가 있다. 유적뿐만 아니라 남산은 자연경관도 뛰어나다. 변화무쌍한 많은 계곡이 있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을 이루며, 등산객의 발길만큼이나 수많은 등산로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곧추 세워 남산을 일등으로 꼽는 사람들은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한다. 곧,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네이버지식백과]

 

흐느적 거리기만 하던 봄비소리...투덜거림 제법 심해진듯..

 

들머리까지 가장 빨리 이를수 있는 길을 택하긴 했으나..길가 오묘무쌍 바위덤 하나라도 참견없이 그냥 지나칠수는 없고..

 

밑그림의 마지막 남은 큰점하나..경주 남산 국사골 상사바위..

   국사골 정상 해발 390m 지점에 상사바위(想思巖)가 있다. 바위의 규모는 높이 11m, 폭 20m로 웅장하다. 바위의 남동쪽 아래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주변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바위의 남쪽면 가운데에 자리한 제단은 높이 2.1m, 폭 1.6m이며, 제단 내부 벽에는 '大ㅇㅇ'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제단 입구에 높이 2m의 계단을 마련하여 제단 내부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제단의 오른쪽인 남서쪽 바위면에는 '삼부사之'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바위의 동남쪽으로 꺾이는 부분에는 '山神命命道人'이 적혀있다. 靈驗있는 바위로 알려져 있어서 바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있다.

 

상사바위는 바위 정상부의 형태로 볼 때 男根바위라 할 수 있다. 남산에서 나타나는 祈子信仰은 대체로 큰 바위에 산신이 깃들여 있다고 여겨 정화수와 갖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기도를 드리는 山致誠의 양상을 보인다. 상사바위 역시 산치성의 대상물인 기자석으로 거석숭배의 대상물이다.상사바위에는 또 노인과 소녀사이의 이룰 수 없는 애닲은 사랑과 관련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국사골 골짜기의 한 마을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외로워 동네 아이들을 보면 자기 손자처럼 귀여워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피리라는 소녀를 퍽 귀여워하였고 피리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피리도 자라서 어느덧 꽃다운 처녀가 되었다.

 

 피리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잇는 음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 피리였다. 그러나 어느 해 봄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시중을 들어 주던 피리가 없으니 못 견디게 쓸쓸하였다. 다시는 못 올 줄 알면서도 피리를 기다렸다.   어느날 방안에 앉아 피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그리던 피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 반가워 "피리!" 하고 외치며 일어섰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할아버지의 눈에는 피리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피리가 나타나고 감으면 머리 속에 피리가 나타났다.

 

 "피리!" 할아버지는 크게 외쳐 부르면서 머리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피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후면 낙엽 지듯이 사라져 갈 몸이 새싹처럼 피어날 피리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잊으려고 다짐해 봤어도 헛일이었다. 피리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어 나와서 혀를 널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피리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과 피리를 아내로 삼고 싶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으나 끝내는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말았다. 고민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이 골짜기에 들어와서 피리가 이사간 마을을 바라보다가 나무에 목을 매어 죽어버렸다. 이 할아버지의 혼은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나와 몸을 감고 혀를 너울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놀라 일어나면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피리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야위어갔다. 동에 사람들 사이에는 할아버지가 피리를 못 잊고 죽어서 그리워하던 그 마음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수군대었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여 괴로움에 지친 피리가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해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래도 잊지 못하여 이렇게 피리 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고는 국사골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피리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피리는 할아버지가 가던 길을 따라 국사골 정상에 있는 할아버지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 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소원을 풀어드리오리다" 하고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피리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곁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 남쪽 바위 허리에 보이는 붉은 반점은 피리 처녀의 핏자국이라고 한다......]

 

이야기야 머....믿거나 말거나..

 

애써 예까지 왔으니..

 

봄비에 젖은 [금오정] 나른한 자태도 곁눈질 해두고....

 

딱히 붙여진 이름은 없지만..

 

그냥...편안안 느낌으로 비치길래 일딴 풀썩..

 

흠 빗방울...제법 토도독 울음소리를 울리는군..

 

그 덕에..내림길 실선에 자리한 도톰한 점하나..고깔바위는 오르지도..비비지도 않고 스리슬쩍 통과하는 걸로..

 

경주 남산 국사골 고깔바위

 

   고깔바위(帽子巖)는 남산 전망대에서 동남쪽으로 500m 떨어진 지점. 해발 320m의 능선 말단에 위치하고 있다. 국사골 삼층석탑에서 올라가면 높이 11m의 바위 위에 고깔을 쓴 듯한 모습의 바위가 남동향으로 놓여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상사바위, 서남쪽으로 남산부석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걸음이야 잰걸음이 되었을 망정..풀어진 마음조차 다그칠수는 없는 노릇..어쩌면 이방향으로 실선을 그리게 한 국사골의 예스러운 유적하나는 꼭 챙겨보는 걸로 결정..

 

경주 남산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7호

지 정 일 2012.10.22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37-1

시 대 통일신라시대

금오산 자락 아래 해발 약 230m 지점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국사골 제4사지는 남산 동쪽 남산 순환도로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360m 정도 올라가다 북쪽으로 난 계곡을 건너 다시 소로를 따라 북쪽 산등성이를 향해 약 300m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대숲을 지난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깔바위 아랫부분에 해당하며, 서남쪽으로는 남산 부석이 건너다보인다.

절터에는 모두 7개의 축대가 불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5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삼층석탑은 이 절터의 가장 높은 지점에 서 있다. 지대석과 북서쪽 기단 면석만이 원위치를 지키고 있고 나머지 부재는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2000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01년 말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국사골 제4사지 삼층석탑은 대체로 9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 주요한 근거로는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과 달리 단층기단을 채택하고 있는 점, 기단 면석 중앙의 탱주가 1개인 점, 기단 갑석 상부 중앙에 별석의 탑신받침을 마련한 점,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일률적으로 4개인 점, 그리고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까지의 높이가 5m 남짓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제작시기 추정의 근거임과 동시에 이 탑의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탑에는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과 구별되는 특징이 한두 가지 더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지대석 주위로 탑구를 마련한 점, 기단 면석 중앙에 별석으로 제작한 탱주를 삽입한 점 등이 그것이다.

조형적·예술적으로 이 탑과 비슷한 수준의 작례가 아주 드문 편은 아니라는 사실, 6매를 제외한 탑구의 석재 대부분과 3개의 탱주석, 그리고 기단 갑석 위의 탑신받침 등이 원부재가 아닌 신재로 복원된 점 등을 감안하여도 그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지금부턴..진짜로 마무리 걸음..

 

촉촉히 안겨드는 봄비에도..

 

오늘걸음...수줍은 연달래 속삭임과 도톰무쌍한 바위덤들의 살내음이 하안~ 가득..

 

그리고 입꼬리에는 탄성과 애증들이 만들어준..흥얼 노래 한소절 대롱대롱..

 

그래...어쩌면 [산]은 이렇게 품어내야 하는건지도...모르지..

날머리.. 다시 통일전 주차장..